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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의 여름은 죽을 만큼 후덥다.
초록빛의 아름다운 잔디밭에 맑고 푸른 수영장.
그곳에 가련한 여인 한 명이 나비처럼 우아하게 접영을 하고 있었다.
아─ 더럽게 덥네.
여인은 끝에서 끝까지 빠르게 헤엄을 쳤다.
그러고선 벌써 질려서인지, 생각보다 수영장이 추워서인지 수영장에서 나온다.
수영장 변두리로는 젊은 남녀들이 라운지 의자에 몸을 기대고 흐뭇하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그녀는 그런 리얼충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선을 훽 흘기며 샤워실로 발을 옮긴다.
여기는 아메리카 합중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세계 대학 랭킹도 상위권에 있는 종합대학이다.
그 유수한 교육환경 속에서 공부하려고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유학생이 온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에는 그녀, 군죠 스즈도 있었다.
"What's up?"
군죠 스즈가 볕에 뜨거워진 몸을 샤워하며 식히고 있는 중, 옆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What's up?"
군죠도 똑같이 답한다.
"캘리포니아가 여름에 이렇게 더울 줄은 몰랐어. 어우 짜증나."
금발에 부분부분 검은색으로 염색을 한 그녀, C.J.는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다.
물론 방금 한 말은 일본어가 아니라 영어로 했다.
"그러니까 말야. 건조해서 드라이어 값을 아낄 수 있는 건 다행일지도 몰라."
"그러게. 대신 고데기를 쓰긴 하지만."
군죠 스즈는 사실 드라이어를 쓰지 않지만 농담 소재로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너 그 Class의 Final Project는 다 했어?"
수영복 위에 티셔츠를 걸치고 있는 군죠에게 C.J.가 타올로 몸을 닦으며 묻는다.
"아니, 아직 다 못했어."
"나도. 이제 조금 남았어."
"주제는 뭘로 정했어?"
"초등기하 정리의 자동증명이야."
그 Class란 Math and Computers라는 수업이다.
그 수업에서 그뢰브너 기저를 이용한 Application을 스스로 생각해서 발표하라는 과제를 냈다.
"아아, Text에도 있던 그거 말야?"
"으응. 삼각형의 중선이 한 점에서 만난다는 거랑 아폴로니우스의 원의 정리같은 걸 그뢰브너 기저를 써서 증명하는 방법이 있었지." 1
여기서 나온 Text란 David A Cox 외 저 "Ideals, Varieties, and Algorithms"를 말한다.
일본어로는 「グレブナ基底と代数多様体入門」(그뢰브너 기저와 대수다양체 입문)으로 번역되어 나와있다.
"그걸 또 증명할 거라고?"
"아니, Wu's method를 쓴 증명과 비교해볼거야."
"오호, 대단한데."
"스즈 넌 뭐 할거야?"
사실 군죠는 주제를 정하지 못했다.
그뢰브너 기저가 뭔지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걸로 무슨 응용을 해야할 지 생각하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뭐어......슬슬 알아보려고."
군죠는 주머니에서 자전거 키를 꺼내며 답했다.
둘은 룸메이트이기도 하다.
유학생들은 집세를 아끼기 위해 룸 셰어나 홈스테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 4명이서 공동 주택의 방을 빌려 집세와 집안일을 분담하는 케이스도 자주 있다.
군죠는 자기 방에서 컴퓨터와 눈씨름을 하고 있었다.
"아아──!! 암것도 안 떠올라!!"
검은 머리를 양손으로 뒤엉클었다.
과제 주제는 그뢰브너 기저의 응용.
그리고 교수는 과제를 내면서 묘한 말을 남겼다.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을 찾을 것."
군죠는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다.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걸 찾으라니? 보통 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게 더 쓸모있잖아? 안 되는 게 더 좋다면 과제 제출도 안 되는게 Credit(학점)에 더 좋은 건가? 이거 모순 아냐?"
이래서 귀류법이란!
군죠는 과제 때문에 생긴 화를 엉뚱한 귀류법에 풀고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 침대에 드러눕는다.
"진짜, 과제 너무 많잖아. 기껏 미국까지 와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미국 대학은 과제와 시험이 많다.
캘리포니아 대학은 기본적으로 가을에 학기가 시작하기에 여름은 방학이지만, 그녀는 시간이 아까워서 Summer Sessions(여름 단기수업)을 수강하고 있다.
수업이 1주에 세 번이나 있는데다 매주 Midterm Exam을 치기 때문에 정말 눈코 뜰 새가 없다.
"...하아, 다들 뭐 하려나..."
누워서 뒹굴뒹굴 구르며 스마트폰을 만지작댄다.
앨범 속에는 일본에 있던 동창들과 즐거운 표정으로 찍은 사진 여러 장이 있다.
그 중엔 혼죠 케이스케도 있다.
"...왜 연락도 없는 거야... 이 녀석은."
일본을 떠나기 전에 군죠는 케이스케에게 가끔 연락하라고 반 강요조로 일러두었다.
유학 중인 군죠가 연락하는 게 보통이겠지만, 군죠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둘의 관계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내가 먼저 연락해볼까...... 아니, 왜 내가 이딴 녀석한테."
군죠는 머뭇거리면서도 문자를 작성한다.
***
잘 지내냐?
나는 잘 지낸다.
일본에는 무슨 일 없냐?
가끔은... 연락 좀 하라고.
미국에 대해선 좀 알고 싶지 않냐?
***
왠지 협박하는 듯한 내용이지만 이래 봬도 나름 몇 번씩이나 퇴고하고 윤문한 명문이다.
답장하기 쉬우라고 ?를 많이 쓰고 있으며, 문장에 '미국'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섞어 흥미를 끌고자 했다.
그럼 이걸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아무래도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만나고 싶다고 안달복달해 하는 타입은 아니다.
만나고 싶으면 억지로라도 이쪽까지 오게 만들 타입이다.
"그럼 간다!!!"
기세 좋게 검지를 스마트폰에 갖다댄
"과제는 잘 되어 가?"
느닷없이 방문이 열린다.
군죠는 그만 폰을 벽 쪽으로 던져버린다.
실내복 차림을 한 C.J.가 군죠의 방으로 들어왔다.
"까, 깜짝 놀랬잖아!"
"어머, 뭐 하고 있었어?"
"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어..."
"오호, 혹시 남친?"
"아냐!!!"
이럴 때 여자의 감이란 날카로운 법이다.
"걔구나?"
"아, 아냐!"
"얼굴에 거짓말이라고 다 쓰여있는 걸?"
군죠는 당황하여 거울을 확인한다.
물론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다.
"하하. 군죠 너다워."
"진짜 놀리지 좀 마! ...그 녀석하고는 정말 그런 관계가 아니라구..."
"정말?"
"정말!"
군죠는 토라진 자신을 발견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반쯤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나직이 중얼댔다.
"하아...... 애초에... 연애같은 건 나답지 않잖아?"
군죠는 지금까지 연애다운 연애를 해본적이 없다.
남자 앞에 서면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저도 모르게 되바라지게 굴고 마는 것이다.
"......그럴지도."
"하하,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괜찮은데?"
"응?"
C.J.가 낙담해있는 군죠를 향해 한마디 했다.
"어울리고 말고를 걱정하는 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스즈는 좀 더 Agressive하고 Kawaii한 애인걸!"
군죠는 그 말을 하는 C.J.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풉! 뭐야 그건!"
C.J.는 그 모습을 보자 안심하고 방을 뒤로했다.
"그럼 방해해서 미안해. 과제 열심히 해!"
"아, 고마워."
군죠가 답한다.
'정말 좋은 친구를 둔 것 같아.'
군죠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 잠깐만. 그래도 하나 조언하고 싶은 게 있어."
C.J.는 방에서 나가다 말고 군죠에게 말했다.
"
A secret makes a woman woman.
비밀은 여자를 여자답게 만든다.
라고 말이지.
"
그러고서 C.J.는 방문을 닫았다.
A secret makes a woman woman.
모 명탐정 만화에서 들었던 것 같은 대사.
비밀. 내 비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추억. 과거.
그리고, 거짓말.
......거짓말?
'그렇지!'
군죠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옳거니, 이걸로 하자.
군죠는 발표의 성공을 확신했다.
- A가 직각인 삼각형 ABC에 대해, A에서 BC로 내린 수선의 발과 변의 중점 세 개가 한 원 위에 있다는 정리―역자 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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